프리다 칼로 그녀는 작품을 보는 것만으로 눈물짓게 하고 가슴 아리게 하는 여성화가이다. 처음 프리다의 그림을 보고 "저 갈매기 눈썹을 뭘까?"하고 생각했던 학창 시절이 생각난다. 남자 같은 얼굴에 짙은 눈썹의 강렬한 인상과 괴기한 주변묘사는 그저 사차원의 정신세계를 가진 사람이겠거니 했었다. 하지만 그녀의 삶을 알고 동정이 아닌 부끄러움을 알게 해 주었다.
작가소개
프리다 칼로는 1907년 멕시코의 코요아칸에서 네 딸 중 셋째로 태어났다. 1913년 6살에 소아마비를 앓아 오른쪽 다리가 불편했다. 어린 시절 가는 다리로 콤플렉스가 있었지만 총명하고 활발한 아이였다. 1922년 프리다는 멕시코 명문이었던 에스쿠엘라 국립예비학교에 입학한다. 전교생 200명 중 여학생이 35명이었다. 이 당시 프리다의 꿈은 의사였다고 한다. 프리다가 18살이던 1925년 하굣길에 버스와 전차가 충돌하는 큰 사고사 나는데 강철봉이 그녀의 옆구리를 관통해 왼쪽다리 11곳, 요추, 골반, 쇄골 등이 골절되고 오른발이 탈골되었으며 갈비뼈가 부러져 대 수술을 하게 된다. 이후 그녀가 받은 수술은 35번이나 된다고 한다. 이 사고로 프리다는 임신하지 못하는 몸이 된다. 3주 만에 깨어난 프리다는 장기입원 할 형편이 못되어 집에서 지내게 되는데 이때 부모님은 프리다를 위해 천장에 거울을 달고 침대 위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이젤을 설치해 준다.
9개월 동안 두 손을 제외한 전신깁스를 하고 누워서 그림을 그린다. 걷지 못할 수도 있다는 의사의 진단에도 재활에 성공하여 걷게 된 프리다는 자신이 그동안 그린 그림들을 평가받기 원한다. 그러던 중 자신의 학교에서 벽화를 그리고 있던 멕시코의 국민화가 디에고 리베라와 만난다. 1929년 21살 차이 나는 디에고 리베라와 결혼한다. 결혼 후 디에고를 내조하기 위해 그림을 그리기를 그만둔다. 1930년 벽화 의뢰로 디에고와 함께 미국 생활을 하게 된다. 아이가 갖고 싶었던 프리다는 몇 번의 유산하게 되고 디에고는 그녀에게 그림도구를 선물한다. 이때 그린 그림이 1932년 <헨리포드 병원>이다. 1933년 록펠러재단의 의뢰로 벽화를 제작하다 레닌의 얼굴을 그려 넣는 것으로 충돌이 일어 벽화제작을 취소하고 멕시코로 돌아온다. 멕시코로 돌아온 후 디에고와 사이가 틀어지기 시작하고 프리다의 여동생과 디에고가 바람을 피운다. 1935년 <단지 몇 번 찔렀을 뿐> 이란 그림을 그려 디에고에게 보낸다. 이후 작품활동으로 빠르게 유명해진다. 1939년 파리전시에서 초현실주의 작가로 인정받게 된다. 그해 디에고와 이혼한다. 1940년 여러 차례 척추수술을 하고 힘들어하는 프리다에게 디에고가 다시 찾아온다. 그들은 그렇게 재결합을 하고 프리다는 꾸준한 전시로 명성을 쌓아간다. 그녀의 몸은 점점 안 좋아졌고 1953년 디에고는 프리다 칼로를 위해 개인전을 열어준다. 자신의 전시에 참여하기 위해 그녀는 침대에 누워 침대와 함께 들려 전시에 참여하게 된다. 다음 해 1954년 47세의 나이로 프리다 칼로는 세상을 떠난다.
작품소개
교통사고 다음 해 병상에 누워 그린 자화상이다. 의사가 되려고 준비하던 학생이 누워서 그린 작품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감각적이다.
프리다와 디에고의 결혼식을 그린 그림이다. 21살 차이 나는 바람둥이로 유명한 디에고와의 결혼을 그녀의 부모님은 반대했다. 그녀의 부모님이 표현하기를 코끼리와 같은 놈에게 비둘기 같은 내 딸을 줄 수 없다고.. 결혼 후 내조에 집중하기 위해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고 하지만 벽화 주문으로 바빴던 디에고를 따라다니며 벽화를 그리는 것을 돕지 않았을까?
프리다는 디에고의 외도로 아이를 갖는 것에 집착하게 된다. 위 그림은 두 번째 임신이 헨리 포트 병원에서 유산되었을 때 위로하기 위해 온 디에고의 그림도구 선물로 그린 작품이다. 이때 이후부터 자신의 그림을 그려나가기 시작한다. 프리다의 그림에는 자신의 아픔을 직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디에고가 프리다의 동생과 불륜의 관계를 가지는 것을 보고 다툰 후 그린 그림이다. 당시 멕시코에서 남편이 아내를 잔인하게 살인한 사건이 있었는데 범인의 인터뷰에서 제목을 따온 것이다. 뻔뻔하게 대답하는 범인과 자신의 불륜행각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디에고를 비판한 것이다.
위 그림은 디에고와 이혼 직후 그린 그림이다. 파리전시 이후로 초현실주의 화가로 인정을 받지만 정작 자신은 환상과 같은 초현실적인 그림이 아니라 자신의 현실을 그린 것이라고 말했다. 프리다는 아픔과 상실의 고통을 내면의 자신을 만들고 대화하듯 이야기했다고 한다. 디에고가 좋아했던 과거의 프리다(프리다가 전통의상을 입은 그림이 많은 건 디에고가 전통의상을 입은 프리다를 좋아했기 때문이라고 한다)와 유럽의 드레스는 현재의 프리다로, 동맥으로 연결된 심장에서 나온 디에고의 어린 시절 사진을 현재의 프리다는 과거의 사진이 있던 곳을 잘라내고 없다.
프리다의 머릿속에 좋든 싫든 디에고 밖에 없음을 알 수 있다. 하얀 실 선이 사방으로 뻗쳐 나가고 있고 덩굴처럼 하얀 실을 타고 나온 식물은 시들어 있다. 재결합 후의 그림이기 때문에 현재의 두 사람의 관계를 보여준다. 시들어가는 식물은 자신의 건강 상태 일 것이다.
말라버린 사막, 망가진 기둥(척추), 그녀의 척추를 고정했던 코르셋, 몸에 박힌 수많은 못 그리고 눈물... 프리다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보여주는 그림이다.
프리다가 죽기 3일 전에 그린 작품이라고 한다. "Viva la vida(비바 라 비다)"는 "인생이여 만세!"라는 뜻이다. 수박은 멕시코인이 가장 좋아하는 과일이라고 한다. 더울 때 먹는 수박은 시원하고 달콤하다. 프리다는 자신이 곧 죽을 것을 안 것 같다. 고통으로부터 벗어 날것과 죽을 때가 이르러 자신의 삶을 돌아보니 고통스러웠지만 디에고와 그리고 화가의 삶 그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던 것 같다.
개인적 생각
사람들마다 아픔을 잊거나 이겨내는 방법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 고통은 자신뿐 아니라 주변 사람도 힘들게 한다. 르누아르는 행복을 그림으로 고통을 잊으려 하였다. 르누아르의 글을 적다가 또 다른 방법으로 자신과 고통과 마주한 여인이 생각났다. 그래서 프리다의 이야기를 글로 남기고 싶었다.
프리다 칼로 그녀의 그림은 내면의 강인함이 느껴진다. 사람들은 자신의 약점이나 아픔을 잘 드러내지 못하고 숨기려 한다. 하지만 그녀는 누구보다도 고통스러웠을 자신의 아픔과 슬픔을 그림 속에 다 드러내고 있다. 나라면 미치지 않았을까? 그림에는 괴기할 정도로 고통을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림 속 그녀는 눈물은 흘릴지언정 괴로움을 입으로 토해내지 않는다. 굳게 다문 그녀의 모습들은 고통을 씹어 삼키는 듯하고 관객을 똑바로 응시하는 눈은 함부로 동정할 수 없도록 당당함을 드러내고 있다. 자신의 고통스러운 삶을 당당히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프리다 칼로의 그림을 보고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자신의 아픔을 마주하고 용기를 얻는 것이다. "Viva la vida!(비바 라 비다)" "인생이여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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