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주변에 기적적인 성공을 거둔 사람은 없나?" "실력이 있다면 누군가에겐 그 기회가 오겠지." 와이프와 차를 타고 가다가 나눈 이야기이다. 교회 동생들 중에 아티스트가 많다 보니 잘됐으면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있다. 마침 글감을 찾다가 알폰스 무하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의 성공과정과 성공 후 그가 이뤄낸 이야기를 해봐야겠다.
작가소개
알폰스 무하(Alphonse Mucha)는 1860년 모라비아의 작은 마을 이반지체에서 태어났다. 무하의 어머니는 장난감 대신 목걸이를 만들어 연필을 달아주었다. 알폰스 무하는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1878년 프라하의 미술학교에 지원하지만 불합격하게 된다. 1880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극장 세트를 제작하는 회사에 수습으로 들어간다. 하지만 다음 해에 회사에 불이나 무라비아 남부에 있는 미쿨로프로 가서 초상화와 장식미술을 시작한다. 이후 쿠엔 벨라시 백작의 후원으로 1988년 파리의 줄리앙 아카데미에 그리고 1889년에는 콜라로시 아카데미를 다닌다. 1889년 말 이후 벨라시의 후원이 끊기고 파리로 가서 삽화 제작 일을 하였다. 1894년 파리 여배우 사라 베르나르(Sarah Bernhardt)의 연극 포스터를 제작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한다. 이 포스터를 계기로 엄청난 돈과 명성을 얻게 되고 그의 화풍을 사람들은 '무하 스타일'이라고 부르게 된다. 성공한 무하는 1910년 조국을 위한 예술을 하기 위해 체코로 돌아와 '슬라브 서사시'(1912-1926년)를 제작한다. 1918년 체코슬로바키아가 독립하게 되지만 1938년 뮌헨 협정 체결로 독일 나치의 통치를 받는다. 1939년 나치는 통치를 위해 '슬라브 서사시'를 없애려 하지만 실패하고 대신 슬라브 민족의 정신적 지주였던 알폰스 무하를 체포한다. 심문과 고문을 받고 석방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폐렴으로 죽게 된다. 나치가 가족 외 장례식 참석을 금했지만 슬라브민족 십만 명이 모였다고 한다.
작품설명
국가에서 인정한 무하가 8살에 그린 공식 첫 작품이다.
무하의 인생을 바꾼 연극 포스터이다. 당시 최고의 배우였던 사라 베르나르의 의뢰로 제작된 포스터다. 당시 사라 베르나르의 연극이 흥행에 실패하고 1895년 겨울 다음 공연을 흥행시키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매니저를 시켜 제작했던 포스터가 맘에 안 들었던 사라 베르나르는 새로 제작할 것을 지시하고 크리스마스이브날 급하게 포스터 제작을 인쇄소에 의뢰한다. 모든 직원이 크리스마스 기간이라 쉬고 있어 파리 전체에 무하만이 유일하게 인쇄소에 남아 일하고 있었다. 수습으로 일하고 있던 무하는 그 일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모든 열정을 쏟아 포스터를 제작한다. 당시 포스터 길이의 두 배는 더 길고(2m) 화려한 이 포스터를 접한 매니저과 관계자들은 모두 욕을 했다고 한다. 기존의 포스터들과 달라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시간이 없었던 매니저는 혼날 것을 각오하고 사라 베르나르에게 보여주자 자신이 본 포스터 중에 가장 이쁘다며 대 만족을 한다. 파리시에 이 포스터로 도배가 되고 다음날이면 포스터들이 거짓말처럼 다 사라져 파리 시내에 단 한 장도 없었다고 한다. 사람들이 이 포스터를 보고 너무 예뻐서 다 뜯어가 자신의 집에 붙였던 것이다. 이 사건으로 사라 베르나르와 6년 전속 계약을 하고 포스터계의 전설이 된다. 이 날 일을 무하의 책에는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라고 했다.
알폰스 무하 굿즈로 가장 많이 쓰이는 그림이다. 달력의 표지를 그린 것으로 여인의 뒤에 12 별자리가 그려져 있고 아래 왼쪽에 해와 해바라기를 오른쪽에 달과 양귀비꽃을 그려놨다.
상업그림으로 엄청난 부를 쌓은 누하는 자신의 조국인 체코를 위한 그림을 그려야겠다고 다짐한다. 1910년 체코로 돌아온 그는 '슬라브 서사시'를 기획한다. 오랜 식민지 생활과 떠돌이 생활을 했던 슬라브 민족의 발자취를 찾아 민족이 머물렀던 모든 땅을 조사하며 완벽하게 역사를 공부한다. '슬라브 서사시'의 제작 기간은 12년이지만 이 기간을 더하면 20년이 걸렸다고 한다. 체코는 '슬라브 서사시'를 국보로 지정하였다고 한다. 보통 이런 그림을 보면 민족주의적인 그림이 많지만 무하의 그림은 슬라브인들의 애환이 많이 그려져 있다. 박해 가운데 고난과 고통을 이겨내고 민족을 지켜 온 그들 한 명 한 명을 우리가 기억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1번부터 20번까지 감상한 슬라브인들은 마지막에 다 눈물을 흘린다고 한다. '슬라브 서사시'는 민족의 자긍심이고 역사 그 자체이다.
'슬라브 서사시'를 제작하던 중간에 그린 그림이다. 울고 있는 여인을 보고 그린 그림이라고 한다. 사막에서 지친 여인이 주저앉아 고개를 들고 눈을 감고 있다. 이 여인은 기도하고 있는 것일까? 뒤에는 늑대 세 마리가 따라오며 죽기를 기다리고 있다. 죽음의 앞에서 어떤 기도를 하고 있을까? 그녀의 뒤에는 후광이 비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그림을 보고 위로를 얻는다고 한다.
개인적 생각
알폰스 무하는 당시 예술가로 인정받지 못했다고 한다. 고전주의 그림에서 벗어나 인상파, 큐비즘, 초현실주의와 같은 개념미술을 중시하던 그들에게는 무하의 작품이 장식적인 상업미술로만 보였을 것이다. 게다가 '슬라브 서사시'의 경우 다시 고전주의 화풍으로 돌아간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자신들이 비판받으면서도 일궈냈던 운동이 그들을 고정관념의 테두리로 가뒀던 것일까? 아님 성공의 부를 이룬 무하를 질시한 것일까? 당시 예술계에서는 인정받지 못했지만 대중들에게 엄청난 사랑을 받았고 '슬라브 서사시'를 보는 모든 사람에게 감동을 선사하였다. 사실 당시 사조들이 만들어낸 작품들이 대부분 감동을 주거나 하진 않는다. 그저 사고의 틀을 깨거나 재미 혹은 즐거움을 주는 것이지. '슬라브 서사시'를 초현실주의나 큐비즘으로 그린다면 그것을 이해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대중의 대부분은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무하의 작품을 보고 비난할 수 있을까? 물론 지금 무하의 작품은 엄청난 가치를 지니고 있다. 현대에 수많은 작가들이 그의 화풍을 따라 그리고 만화가들과 광고계에서도 그의 화풍은 여전히 사랑받고 있다. 또한 그의 일생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어준다. '슬라브 서사시'를 보고 그 민족에게 국한된 예술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자신의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 자신의 민족과 소외된 사람들을 돕고자 했던 그의 정신은 존경받아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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